12/10/2025
1. 작년쯤인가, 어떤 백발의 노신사분이 한양대 수업 중 우리 반 학생들이 핀업을 하고 피드백을 주는 중에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조용히 보시더니 작업들이 훌륭하고 인상적이라는 말씀에 더해, “이런 선생님이 오랜만”이라는 짧은 말을 간단히 남기고 가셨다.
사람을 한 번 보고 얼굴을 기억하는 것을 잘 못 하는 나로서, 아주 짧은 순간 스치듯 지나간 그분을 이번 ‘구가 도시건축 전시’에서 다시 뵈었고 인사를 나누며 그분이 일본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먼저 “한양대에서 한 번 뵌 적이 있는 것 같다”라고 했더니 알아차리셨다. 감사하게도 요즘 보기 드문 열정적인 선생이라 기억하고 계셨다고 했다.
도미이 마시노리.
구가건축에 계시면서 한양대 객원교수이시다. ‘모던 인천 시리즈’ 책의 공동 저자이시기도 하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다양한 학생들과 세미나 시간을 갖는다고 하셨다. 한국에서 22년을 사셨고, 워낙 짧은 순간의 대화였고 한국말을 꽤 잘하셔서 작년에 뵈었을 때는 일본 분이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기 전에 연락을 드려 한 번 찾아뵙고 싶기도 하다.
2. (교육이 본업이 아닌 나로써는 잘 하지 않는 이야기지만 티칭 경력도 한 십년쯤 된듯 하여 그간의 생각을 정리해봄)
튜터마다 건축학도를 가르치고 대하는 방식이 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건축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설계는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 건축을 대하는 태도가 바르게 서 있다면, 사실 건축뿐만 아니라 그밖의 모든 일도 잘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학생들을 보면 가장 안타까운 것은 어린 시간을 너무나 치열하고 정해진 대로 학업만 해 왔다는 점이다.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 하면서 그밖의 것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고, 스스로 주제를 설정하고 판단하며 수행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에는 굉장히 취약하다. 내가 궁금한 것을 찾아보고 탐구하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 내고 다시 그려보고 성찰하는 이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건강한 태도가 필요한데, 그것을 경험해 본 아이들은 거의 없다. 거기에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그러한 학습을 해 본 적이 없는 성인이 된 친구들에게 이 메커니즘을 이해시키기란 대단히 어렵다. 특히 저학년일수록 마치 백지에 아무 물감이나 칠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굳어진 상태에서 12년간의 학습 방식을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자기만의 방법을 찾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건축적 스타일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일은 하지 않아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자가 찾고 감당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 가운데서 훗날 뛰어난 건축가가 등장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태도와 철학, 방법을 분명한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학부 저학년과 고학년을 모두 가르쳐 보고, 한양대에서 2학년을 맡았을 때 가장 즐거웠던 이유는 아이들이 가장 순수할 때이고,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점점 쉽지 않은 듯하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약해지는데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폐해라고 확신한다. 자신이 주제를 정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 본 적이 없는 교육의 결과다.
다가올 AI 시대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지식 전달 중심의 교육은 점점 의미를 잃고, 도구를 다루는 능력보다 문제를 발견하고 맥락을 해석하며 창의적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핵심 역량이 된다. 교육의 목표는 더 이상 정답을 맞히는 것에 있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스스로 사고 체계를 구축하며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시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데 있다. 건축 교육 역시 조금만 찾아보면 어느 정도의 깊이 까지 알수 있을 ‘건축 스타일의 전수’나 ‘정보를 습득하는 법’보다 ‘감각하고 사유하고 관계를 재구성하는 법’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것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역량을 확장하는 근본적인 대안이 될 것 같다.